촛대바위에 다시 섰다.
거대한 너울파도에
목숨 걸고 소지도를 탈출하던 그날
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어둠속으로 쓸려갔던 곳.
보조가방에서 꺼낸 팩소주 하나를 열어
바다를 향해
두어번 획하니 휘두르며 고시레를 한다.
또 내가 여기에 섰다.
그 긴 밤, 엄습하던 두려움 때문에
다신 발을 딛지않겠다고 했던 촛대바위에 다시 섰다.
머나먼 대양, 그 모퉁이
저 멀리 해원(海源)의 언저리로 언듯언듯 비치는
야트막한 점점이 직벽의 섬들.
발 아래로
넘실대는 아가리는 입을 쩍 벌리고
살아서, 퍼렇게 살아서
철썩철썩 넘실댄다.
저 아가리가
난데없이 쏴아악~치고 올라 나를 삼킬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걸로 나의 낚시도 끝장일테지.
아열대(亞熱帶)의 구렁이가 꿈틀대듯
말밑을 내려다보면 촛대바위는
늘 살아서 꿈틀대는 대양의 거친 호흡이다.
큰 고기로 한 마리만 잡을까
그냥 올라오는대로 마구 잡을까
주제넘게도 촛대바위는 내게 이런 고민을 하게 한다.
덩치 큰 참돔과 벵에돔이 사시사철 사는 곳.
내 이러한 고민은
이곳에 그렇게 큰 고기가 있기 때문일테지.
바다에서 몇번을 죽었다 살아난
꼬질꼬질하게 늙은 선장은
그만의 어법으로 내게 주의를 준다.
"우나리(너울)가 치모 전화하소"
그러곤 휑하니 가버렸다.
저 선장을 만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국번이 여러번 바뀌었지만
뒷자리의 숫자 네개는 어느 기록보다 친숙하다.
그것은 우리 인연의 끈이
그만큼 질기다는 것일테지...
그저 초라한 어선이었던
늙은 선장의 배는 이미 몇번의 옷을 갈아입었다.
얼핏보면 거의 썪은 배 같지만
이곳 매물도를 오갈 때는
적어도 가장 믿음직한 벗이다.
이런저런 세월을 도시에서 보낸 그는
많고 많은 섬 중에
이 순정(純情)한 섬, 매물도에 둥지를 틀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는
그의 생김새보다 훨씬 철학적이며
철학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다.
매물도에서 올라오는 미터급 농어도, 참돔도
대물 긴꼬리벵에돔도
흔해빠진 고등어나 부시리도
그에겐 모두가 그저 생선이고 일용할 양식일 뿐이어서
내가 큰 고기에 욕심이 좀 날라치면
"아무끼나 잡히모 버리지말고 갖고 오소" 당부를 하는 통에
도시에 찌든 나도
매물도에선 그 선장을 닮는다.
50이 넘는 긴꼬리를 잡아도
박수치는 사람 하나 없고
시커먼 62짜리 늙은 감생이를 잡아도 소문나지 않는 곳
기록도, 소문도 필요없으며
인터넷도 필요없는 섬.
그저 방파제건 갯바위건
여기저기 갯바위에서 비명을 질러대는
대물낚시꾼의 희열이 있고
배질하고 미역을 따는 마을사람들의
한가로운 노동이 빛나는 섬, 매물도.
아, 촛대바위에 서면
언제나 뜨겁게 꿈틀대는 대양의 힘과
그 앞에 선 인간의 무기력함을 느낀다.
그리고 낙엽같이 초라한
인간의 죽음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