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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2012년)
예순여덟, 아직은 팔다리에 힘이 남아 있어서 하천 둘레 길을 달릴 수 있을 것이고 이따금 고향에 있는 월명산도 오를 수 있겠지, 화창한 봄날이면 집사람과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고 신바람 나는 바다낚시도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총기도 그렇게 쇠퇴하지 않아서 이따금 사춘기 시절 가슴 두근거리게 하던 여학생들 생각도 할 테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좋아하는 책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재롱을 부리는 손자와 손녀도 두셋 쯤 있을 것이고 얼굴에는 윤기도 제법 빠지고 굵은 주름살도 많이 생겼을 것이다. 머리에는 희끗희끗한 은발이 절반 쯤 덮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예순여덟은 장년(壯年)도 아니고 노년(老年)도 아닌 그야말로 어중간한 나이이다. 누구 말마따나 풋내기 늙은이라고 해야 하나, 예순 여덟은 10년 후 내 나이이고 24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dl다.
명이 길어서 다시 10년을 더 산다면 일흔여덟,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가 되는 나이다. 흔히 인생은 팔십부터라고 하지만 글쎄, 내가 볼 때 일흔 여덟 이후부터는 그야말로 할 일 다 해 놓고 덤으로 사는 나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래도 일흔여덟 나이에는 팔다리 기운도 많이 빠졌을 테고 머리도 백발이 다 되었을 것이다. 아마 허리도 제법 굽어졌을 것이고 얼굴에는 굵은 주름살이 생기고 어쩌면 검버섯도 피어있을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총기도 많이 흐려졌을 것이고 이빨도 빠져서 합죽이가 되어 있겠지, 이제는 다리 힘도 없어서 고향에 있는 월명산을 오르는 것도 힘들 것이고 가슴 설레는 바다낚시도 다니지 못할 것이다. 글쎄, 어쩌면 햇살이 따사로운 늦가을 오후 마을 앞 방파제에 앉아 망둑어 낚시를 하면서 망중한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봄이 되면 나이든 아내와 시골집 작은 텃밭에 고추와 상추, 쑥갓 등 채소를 심고, 한가한 날에는 벼루에 먹을 갈아 붓글씨를 쓰기도 하고, 가끔은 색 바랜 옛날 사진첩을 바라보면서 풋풋했던 젊은 시절 모습을 회상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짓기도 할 테고, 책읽기 좋은 날에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잔잔한 에세이나 소설책을 읽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세월이 흘러서 나이를 먹는 것은 그렇게 아쉽지 않다. 안타까운 것은 10년, 20년 후에는 집사람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가 되고 미림이와 형렬이가 마흔을 넘어 중년이 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인생무상이요 일장춘몽이다.
10년, 20년 전의 나를 되돌아본다. 서른여덟과 마흔여덟,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IMF 이후 날밤을 새가면서 열심히 일도 하고 승진에 대한 욕망도 있었다. 반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변화가 많았던 나이였다. 마흔여덟 무렵 일찍 오십견(五十肩)이 찾아와서 반년 가까이 고생을 했었고 백내장 수술도 두 번이나 받았었다. 무엇보다 무성하던 머리숱이 비루먹은 강아지 마냥 뭉떵뭉떵 빠지고 귀밑머리에는 어느새 하얀 서리가 내려앉아서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실감해야 했다. 그리고 20년 넘게 피워왔던 담배를 끊고 늦게나마 철이 들기 시작한 나이였다. 서른 살 무렵 동양화 공부에 빠져서 하루하루 위태롭게 살아왔던 내가 서른예닐곱 즈음 정신을 차리고 삶과 인생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마흔 예닐곱 무렵 직장에서 모진 일을 몇 번 겪고 난 후 일기도 쓰고 산문과 에세이 등 책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내 나이 서른여덟과 마흔여덟은 일과 꿈과 욕망이 함께 했던 내 인생의 전성기였고 전환기였다. 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바쁘게 살았던 시절이었다.
사람일이란 알 수 없다. 10년, 20년 후가 아니라 내일 갑자기 죽음이 찾아 올 수도 있고 또 언제 건강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든 건 운명이다. 한 가지 다행한 것은 언제 죽더라도 인생 육십 가까이 살았으니 큰 아쉬움이 없고 이 세상을 떠나가더라도 남은 가족들 생계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운이 좋아서 10년을 더 살고 명이 길어서 20년 그 이상을 산다면 그건 내 복이다. 명이 길어서 10년, 20년 이상 산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남은 내 몫의 삶을 후회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그리고 내가 진정 원하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나이 들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몇 가지 있다. 먼저 나만의 책(에세이)을 몇 권 더 내는 것이다. 비록 글재주는 없지만 내후년 회갑기념으로 에세이 한권을 내고 다시 5년 후 예순 중반 무렵에 한권, 그리고 일흔 살 즈음 한권 마지막으로 일흔 중후반 무렵 한권을 더 내는 것이다. 다음은 40킬로 이상 달리기를 하는 것이다. 일흔 살이 되기 전에 극한의 도전, 즉 서천에서 내 고향 솔머리까지 시간 구애를 받지 않고 왕복 달리기를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그 다음은 집사람과 여행 겸 우리나라의 섬들을 한번 둘러보는 것이다. 몇 년 후 집 사람이 퇴직하면 집사람과 서해 이북에 있는 연평도에서부터 어청도와 서남단에 있는 홍도, 남으로는 우도와 마라도, 청산도와 보길도, 매물도 등을 다녀오고 동으로는 울릉도까지 아름다운 섬 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여행과 더불어 모든 낚시인들이 꿈꾸는 섬, 추자도와 거문도, 가거도 등에서 며칠 동안 낚시를 하는 것이다. 현지 민박집에서 한 열흘이나 보름 정도 머물면서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하루 종일 느긋하게 낚시도 즐기고 이따금 카메라 하나 둘러메고 한적한 섬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 멋진 풍광 사진을 찍고 조행기도 쓰고 싶다. 서예생활도 하고 싶다. 지금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시 미루고 있지만 이후 나이가 들고 여건이 되면 심신수양 겸 한문과 서예를 배워서 노후 취미생활을 하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이 또 하나 있다.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몸으로 하는 재능 기부나 사회봉사활동은 할 수 없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미력하게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후원 사업에 동참 해 보고 싶다.
10년 20년 후, 지금은 먼 세월 같은 아득한 느낌이 들지만 내 모습이 기대된다. 10년, 20년 후 내가 예순여덟과 일흔여덟 살이 되었을 때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면서 후회스럽지 않게 잘 살아왔다고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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