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는 누구보다 야영낚시를 좋아한다. 보다 정확하게는 야영 그 자체를 좋아하고, 누구보다 라는 비교급은 빼는 게 옳겠다. 그래서 어지간히 기상이 맞으면, 시설 좋은 콘도나 여관보단 호젓한 민박을, 그보다는 야영을 더 좋아한다. 그리고 야영 중에서도 텐트치고 잠을 자는 야영보다, 깔개 하나 달랑 깔고 침낭 속에 들어 하늘과 얼굴을 맞대면 하는 그런 야영을 훨 더 좋아한다.
아무리 야영이 좋기로서니, 구질구질함이 묻어나는 비 오는 궂은 날씨나 치운 겨울, 소음과 번잡이 따르는 시설 숙영지는 싫어하고, 함께 정담을 나눌 친구나 이웃이 없는 그런 외로운 야영도 더욱 부담스럽다. 이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조건이 맞았을 때’ 라고 할 수 있으니. 짐작컨대 나는 문명/대인기피증 환자는 아니고, 절박함과 한계상황을 이겨 나가길 즐기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 천성적 모험가 기질은 더 더욱 아닌것 같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폐쇄 기피증이 있는 어설픈 낭만주의자쯤이나 될까. - 내 희망은 자유의지를 가진 자연주의자쯤으로 불리길 바란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이런 부류를 뭐라고 한다는 걸 안적이 있었는데…….)
7 나는 그 섬의 그 선장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인지 모른다. 출신배경이나, 교육정도, 성격에 따른 성분도 아는바 없고 - 이러한 것들이 한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 내가 가진 정보란 그 마을의 몇 안 되는 종선 운영자들 중 가장 연장자,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어촌계장으로서 자의 반 타의 반 부락공동체의 한 책임을 떠맡고 있다는 사실 뿐……. 진즉 중요한 요소인 어떤 사고방식, 가치관의 소유자인가 하는 문제는 기회가 적어 더 두고 볼 일이다. (나보다 훨씬 연장자로서 이런 표현이 결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 남으로부터 관찰 당하고 평가받는 운명이다.)
낚시 둘째 날, 주의보로 민박집에 발이 묶인 우리 일행이 좀이 쑤셔, 진반 농반 애교 섞인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파도가 잦아듦을 강변, 배를 낼 것을 종용하자. ‘일 없시유’ 아니지 ‘일 없어라.’ 이 한마디로 명쾌히 선을 긋는 그 우직함.
그래서 하릴없이 어린애처럼 칭얼대며 보채길 그만두고 화제가 자연스레 ‘야영금지’ 쪽으로 옮아갔는데……. “ 여름 낚시에 야영 금지라니, 도대체 낚시를 하라는 소리요 마라는 소리요?” “ 뜨거운 햇살아래 찜 쪄 먹을 일 있어요? ” “ 낚수꾼이 외면해 이 섬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텐데…….요이이? ” “ 도대체 고객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기나 한거요? ”
사람 좋은 어색한 웃음으로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 선장. 그의 변(辯)을 한번 들어보자.
“ 생각들을 한번 해보씨요 잉. 손바닥만한 섬에 괴기 잘되는 뽀인뜨마다 몇 팀이 들어가 한 열흘 죽쳐불먼, 다음에 들어온 사람은 사날을 기둘려도 앉고 싶은데 한번도 몬 안자불고, 낮에 고기 시바리 잡으모 딜거럴 밤새워 열바리 잡아부러 고기 씨가 말라 버리지 않겠소이? 스티로폼 박스 몇나씩 얼음 채워 산처럼 싸아노코 거기서 먹고 자고 싸니, 그 오염은 또 월매며, 우리뜰한테도 전혀 도움이 안 되지라. 그라고 야간에 갑재기 파도라도 쳐불먼 배 몰고 나가야하는 우리뜰 위험은 누가 책음질것이요이? “
우리,,,, 잠시 후 원기를 회복해. “ 그건 소수, 말 그대로 일부 양식 없는 치들이나 하는 짓이고……. 저녁 일찍 먹고 해거름에 나가 시원한 밤바람 쐬며, 달보고 별보며, 파도소리 곁들여 빨갛게 빛나는 전자찌 바라보는 즐거움이 그야말로 여름 낚시 진수 백민데. 선장은 그 맛을 몰라요. 몰라. 그라고 염천 피해 아침 되면 딱 딱 들어오지. 한숨 늘어지게 자고, 한 낮에는 동구 밖 몽돌 밭에서 해수욕도 즐기고……. 선장은 도시락 배달하러 여러 번 왔다 갔다 하지 않아서 좋지, 우린 괴기 푸짐하게 잡아서 좋지. 누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마당 쓸고 돈 줍고……. 고고고 정말 애고고고네 “
“ 그란데 선장님, 지금은 배를 내아도 되질 않겠소? ” “ ????? ” 낚시꾼이 어딜 가나. 뜬금없는 기습이다. 파도도 겉보긴 많이 죽은듯하고, 결정적으로 그때 하늘이 막 트이며 햇빛이 났었다. 우리는 반죽이 잘 맞는 십년지기들처럼 협동으로 한 사람의 선장을 어르고 뺨치니 (이는 일행 중 십수년간 이 섬을 70회 이상 드나들며 보이지 않는 신뢰와 정분을 쌓은, 다시 말해 상호 호혜의 분위기에서, 묵시적 동의 아래 이뤄지는 교분의 한 양상이다. 오해 없기를.)
그래서 배를 내게 되었다. 룰루랄라. 가랑잎 같은 택택이 목선을 타고 휑하니 나서니. 연안의 흔한 소형낚싯배 정도만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작은 파도에도 제법 롤링을 탄다. 남대문 돌아 국도 홈통. 내리 려는데. 일행 중 두 번째 연장자이신 팀의 리더격인 분이 (연세는 잘 모르지만-아마도 50대 중반. 성함은 안다. 그러나 그분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으므로 실명은 피한다. 본인의 동의 없는 초상권 포함 성명권도 보호되어야 하는게 네티켓이다. ) 그냥 철수를 하자 신다. 선상유람 한번 잘한 택이다. 돌아오는 길. 일없이 실실 웃음이 입가로 비어져 나온다. 기분이 좋다. 흐뭇하다. - 이 지면을 통해 그분께 감사드린다. 그리 오복장조림을 했건만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는 그 과단성과 판단력. 대가다운 면모다. 그제 밤, 야영이 금지된 줄 모르고 들어와, 한 여를 통째로 전세 내어 포진했던 팀들은 타고 온 원배를 불러 바로 철수를 했는지 여가 비어있다. 다행이다. ‘대한민국 통금있소? 이 섬이 전부 당신 땅이오?’ 자칫하면 시끄러운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었는데. 낚시꾼이란, 알고 보면 참 착한 심성의 무리들이다.
8 이제 이 글을 맺어야겠다. 모든 사물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야영낚시 금지’ 찬반논란을 떠나, 지금 이 시점에서 주목하고 싶은 건, 그러한 결정이 그들의 자유의사로 내려졌고, 그로부터 주도되었다는 사실이다. (관의 개입, 외부압력, 청탁에서가 아닌) 신선한 충격이다. 누가 나보고 굳이 한편에 서라 한다면, 나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쪽에 서고 싶다. 황금. 물질. 금전만능 따위로 지칭되는 이 부박한 세태에, 눈앞에 뻔히 보이는 쩐을 마다 하고 이런 결정을 내리기가 말처럼 그리 쉬웠을까?
조상 누대로부터 물려받은, 고향을 사랑하고 지키고픈 순수. 그러면서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오늘, 이 현실을 반추해 본 듯한 명분과, 장기적으로도 그들에게 실리를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한 전략적 현명함이 읽혀지므로.
실정법이 어떠하던, 1차적으로 그 섬은 그들의 것이다. 국가란 定意, 기본 틀도 그러하듯, 그 땅에서 나고 자란, 즉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바로 우리나라이듯이. 그리고 이번 결정이 또다시 외압이 아닌 그들 자치로 번복된다하더라도, 나는 다시 그들의 결정을 존중해 줄 것이다. 왜냐? 나는 낚시꾼이니까. 이번엔 더욱 각성이 따른 나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스스로라도 달아야겠지만.
각설하고 낚시터 주변에서 전설 같은 옛날 얘기를 가끔 듣는다. 하룻밤에 대박을 터트린 꿈같은 일, 말이다. 부럽다. 그러나 안타까웁게도 현실에서는 이제 그 꿈을 접어야 할 것 같다. 바다가 있는 다른 행성을 찾는다면 또 모를까.
최근 백년간, 핵폭발에 비견되는 어느 한 종(種)의 폭발적인 증가로, 그들의 무소불위 적 권위 -오만, 편견, 탐욕 등 로 인하여 대단히 복잡해지고 병든 이 지구에서. 그래도 어쩌겠는가? 좀 비좁고 불편하드라도 서로 좁혀 조금씩 양보하고, 남의 방귀냄새는 역하 지만 웃을 수 있는 여유로, 서로 부딪치더라도 쓰다듬어가며 살아갈밖에. 왜냐? 부(富)는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니까. 환경 XX에 의한 재앙은 빈부차별(貧富差別)이 없으니까. 지금 같으면 그 누구도 아닌 그들 종(種) 스스로에 의해 멸망할 확률이 가장 높으니까. (말이 이상한 방향으로 가네....위의 3문장은 어느 환경학자의 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들 수컷들의 몸속에는 원시 야성이란 유전인자가 아직도 상당부분 살아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낚시꾼이란 족에게서. 그렇지 않고서야 오늘날 이들의 행태를 뭐로 설명할 것인가? 스트레스 해소, 재충전, 기분전환……. 이 모두는 곁가지들이다. 진화의 첨단을 걷는, 그래서 자기 복제능력까지 갖춘 재빠른 두뇌회전의 그들이 효율성이란 계산과 가치를 접고, 수렵본능이란 카타르시스에 의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 같은 우매한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혹시 그대는 아는가? 낚시와 사냥의 차이를 정답은, 사냥은 대상을 주검으로 맞고 낚시는 대상을 생명으로 맞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생사여탈권이 다시 한번 그대 손에 있을 수밖에. 그래서 낚시와 사냥이 차별되고, 우월한 이유다. 가만히 들여다보라. 낚시를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생명을 사랑하는 착한 본성을 지닌 그런 ‘좋은 사람’임을 발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