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장대로 즐기는 낚시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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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장대로 즐기는 낚시사계!

G 4 2,376 2003.12.18 15:15
아련한 추억을 더덤어 본다.
나의 살던 고향은 .... 예전의 넓고넓은 개뻘이 지금은 매립되어 "스포츠파크"라는 남해의 명소가 되었지만 나의 유년기는 개뻘과 주위의 갯바위가 놀이터였다.
8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개뻘이 매립된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중동특수가 끝날즈음 철수하는 토목회사들이 많았으며, 정치권에서 그러한 회사들의 회생도 돕고 전국적으로 개뻘을 매립하여 경제도 살리고 국토를 확장하자는 아주 무식하고 단순한 논리때문에 오늘날 개뻘의 가치도 모른채 무차별매립이 자행되었으며 여태껏 수많은 매립지가 방치되어 있다.
이상, 각설하며 본론으로 들어가니 나의 어릴적 낚시사계가 시작된다

1. 겨울(장대를 준비하는 계절)
개뻘이 매립되기전 고향마을에서는 한겨울에 김발(재래식 김양식)을 하여 농한기소득으로 목돈을 만지기도 하였다.
그런 연유로 김발의 재료가 되는 대나무는 곧 돈이며 큰 재산이었다.
불행이도 우리집은 대밭이 없었다.
언제부터 내가 낚시를 하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5학년때부터 대나무로 장대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나는 겨울방학이면 개뻘에서 개불(보기와는 달리 회맛이 끝내주며 감시처박기할때 미끼로는 최고임)과 낙지를 잡아 이것을
횟집에 넘기기도 하고 손님이 방문하면 대접(용돈받을 목적으로)하기도 하였다...아! 개불먹고 싶다.
그리고 틈틈히 이웃에 있는 대밭에서 대나무를 서리하였다.
은밀히 침투하여 주인집의 인기척을 살핀 후 대나무를 고른다. 길이와 굵기, 곧은 상태를 봐서 낫으로 재빨리 갈무리하여 도망친다(잡히면 반죽음).
무사히 사정권에서 벗어나 마음을 진정시키고 대나무를 살피면 곁가지가 있을때와 없을때의 자태는 180도 틀린다.
(한마디로 말하면 화장발속에 감춰진 지금의 마누라 얼굴이다.....ㅋㅋㅋ)
언젠가 옆집아저씨가 굽은 대나무를 불에 구우면서 펴는것을 봤던지라 나도 짚단에 불을 피워 대나무를 폈더니 의외로 훌륭한 장대가 되었다.
이렇게 3대를 만들어 처마밑에 매달아 두면 내년 낚시준비는 모두 끝났다.

2. 봄(노래미, 볼락, 도다리 제철)
육지에 개나리, 진달래가 지천이면 바다속에는 몰이 지천이다.
처마에 곱게걸린 대나무장대로 민물낚시의 수초치기처럼 구멍치기를 하면 씨알굵은 노래미, 볼락 등이 정신없이 물고 늘어졌고 방파제 끝바리의 모레밭에서는 살오른 도다리가 지천이었다.

3. 여름(낮에는 자맥질, 밤에는 장어낚시)
되도록이면 낚시를 안하고 수경만 들고 다녔다.
썰물때 개뻘에 가면 질피밭에는 없는것이 없었다..... 소라, 피조개, 키조개, 게 등등등
갯바위근처에는 해삼이 많아 처치곤란이었고 가끔 전복을 따기도 했었다.
자맥질하여 우뭇가사리, 청각도 채취하고....... . 밤이면 호박잎 몇개따서 장어낚시를 다녔다.

4. 가을(감시, 깔다구, 꼬시래기)
등짝에서 허물이 서너번 벗겨질때쯤 여름이 끝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마을옆 갯바위(지금도 마을분들은 "뒤목등"이라 부르며 명포인트임)에서는 감시가 나를 기다린다.
그 당시는 읍내가 멀어 채비를 구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갯바위에 남들이 버린 줄이며, 봉돌, 바늘을 주워서 재활용하고 찌는 오동나무를 깎아서 만들었다.
미끼는 개뻘에서 어린쏙과 지렁이를 잡고, 몰밭에서 새우를 떠서 사용하였다.
그때는 쏙 한마리에 감시 한마리였다.
줄의 호수는 모른다. 바늘의 호수도 모른다. 당연히 채비 발란스도 모른다.
그러나 옆에서 비싼 장대(3단 가공장대)들고 폼잡던 어른들의 가슴속에 불을 많이도 지폈다....ㅋㅋㅋ
나의 죽검은 바람을 가르며 감시를 무뽑듯 무식하게도 뽑았다.
그렇게 잡은 고기는 가을햇살에 잘말려 추석때 조상님께 진상도 하고 미역국을 끊여 먹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었다.
지금은 4짜, 5짜가 귀하다고 하지만 그때는 우리집 영구(?)도 5짜 감시 대가리를 물고 다녔다... 진짜다.
깔다구는 왜그리도 많았던지......
시골집은 만조시 담장밑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태풍이라도 온다면 피난하기도 했었다.
불알친구중에 "꼬시래기"라는 별명을 가진놈이 있다.
꼬시래기를 잘 낚는 친구라고 생각했다면 틀렸다.
만조시 간혹 담장에 기대어 낚시를 하면 꼬시래기가 잘도 잡혔다.(영구에게 모조리 하사함)
꼬시래기는 기억력이 0.3초라 뭍으로 올라왔다가 도망친 후에도 또다시 지 죽을줄 모르고 낚시바늘을 붙잡는 아주 머리가
나쁜 고기다.
그만큼 머리가 나쁘다는 뜻인데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나의 친구 "꼬시래기"는 자수성가하여 분당에 살고 있다.

중학교 시절까지 위와 같이 낚시를 하였으니, 가히 나의 대나무장대 만드는 기술은 "명인"칭호를 들었으며 친구들에게 하사한
대나무장대의 수를 헤아린다는것은 불가능하다.
대밭주인들의 경계대상 1호로 지목되어 혼도 많이 났지만 감시몇마리 상납한 덕분에 훈방도 많이 되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처지는 어떠한가?
고기에게 외면받고.... 가족에게 푸대접받고.....친구들에게 허풍쟁이 되고......
7월에 이사하면서 올 가을 감시사냥에 대비하여 냉동기능이 되는 억수로 비싼 김치냉장고(봄에 도다리를 많이 잡아서 냉동실 공간이 부족함을 뼈져리게 느낀바)도 장만하였건만.... 냉동고에는 홈쇼핑에서 구입한 자반고등어가 자리를 잡았으니!!!!!!
육지가 흉년이면 바다도 흉년이라 하였던가..... 아! 옛날이여.

꼬시래기야, 올해는 감시 틀렸다. 내년 가을에는 필히 한마리 보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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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G 미스타스텔론 03-12-18 16:32
님의 글을 보니 저도 옛날 추억들이 새삼스럽게 떠 오릅니다.
5살부터인가 신우대로 출발하고 길죽한 돌을 봉돌삼아 무식한 원줄에 주낚7~8호 바늘 묶고 멸치,지렁이로 선창이나 바위에 던져 놓으면 팔뚝만한 놀래미를 낚아 안고 할머니에게 자랑한 일들, 나중에 알았지만 우럭보다 큰 꺽지가 대를 끊어 버리고 멀리 끌고 가 울고, 나중에는 초등 1학년때에는 수영하여 놈을 잡은 일, 오전에 대나무바구니에 솜팽이 가득 담고 밤에는 장어로 가득차고 가을에는 감시와 농어가 대를 두동강 내고 바위에서 문어와 해삼과 전복을 주워 담고 우뭇가사리를 팔아 학비에 보태고 멸치떼가 그물을 찢어 버리고 멍석만한 가오리, 미터급 참돔,민어 등이 주낚에 올라오고 선주와 어민과 나누고 지게로 져 가고, 아 옛날이여!-----------------------------------
G 꼬시리 03-12-18 17:25
님의 글로 정말 재미와 향수를 느끼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향이 저와 같은 남해라서 더욱 반갑네요
저는 지난 주에 남해 미조에서 배타고 갈도에 가서 뽈락 외줄 낚시로 냉장고에 가득 뽈락을 넣어 놓아 이번주말에 부산 가는 길에 어머님 계신 형님집에 드릴려는데 삼여님도 시간되면 뽈락치러 한번 가시지요. 큰 냉장고 채우시게. 역시 남해 고기가 맛있데요.
G 삼여 03-12-18 19:38
꼬시리님 볼락치려 가시면 연락한번 하입시다.(정보공개중임)
한수 배우고 싶습니다.
저는 국민의 세금을 축내는 철밥통(?)인지라 평일은 곤란하나 주말 및 휴일은 언제던지 환영입니다.
오늘 저녁반찬도 자반고등어 먹었습니다.
볼락먹고 싶어라!!!!!!!!
G 내사랑감시 03-12-27 14:24
음....
정말로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좋은글 입니다.
저는 동해바다(감포) 촌넘 인지라 감시랑 꼬시래기는 낚아보지 못했습니다.
허나 죽검? 으로 거의 5살때 부터인가? 바닷가를 누볐지요.
감포말로 일명 놀래기(노래미)는 한번가면 최소 50마리 이상 뀐대기(고기 아가미 꿰어 엮는것)에 꿰어 죽검 어깨 뒤로 메고 집으로 개선장군 처럼 들어 왔죠.
돌아가신 우리 모친 왈! "먹지도 않을걸 뭐할려고 많이 잡았노? 개나 삶아 줘라"
ㅎㅎ 정말 그리운 옛날일이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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