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통장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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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통장님 이야기...

G 4 2,635 2003.02.0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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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통장님 이야기...




      김일석



      삼대 째, 그 섬에서 나서
      이제 육순에 접어든 어느 작은 섬의 통장님은
      사흘드리 쪽문이 덜컹거리고
      허연 얼룩을 남기는 소금바람이 창을 때려도
      하릴없이 방구들을 지고
      텔레비젼 앞에서 넋을 잃고 앉아있어도
      그저 내일이면 날이 자겠거니 생각하는 사람이다.



      건달처럼 팔자 걸음을 걸어도
      결코 뛰는 법이 없으며
      혹 길을 가다 아는 얼굴이라도 만날라치면
      주름 진 볼을 씰룩거리며 거친 목소리로 인사를 나눈다.
      언제나 볼품없이 거무티티한 얼굴이지만
      언제나 누우런 이를 드러내어
      밝게 웃는 사람이다.



      궂은 날만 아니면
      바다에서건 밭에서건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이 아니어도
      시계부랄처럼 매일 생산적인 노동을 한다.
      몇날며칠 배가 못 떠 찬거리가 떨어져도
      허름한 냉장고에 시큼한 국물김치만 있으면
      밥 한 사발 거뜬히 비우는 사람이다.



      혁명의 의미는 잘 모르나 한번 쯤은
      세상을 밭 갈 듯 갈아엎어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
      낡은 형광등 하나만 갈아끼워도 세상이 달라보이듯
      선거철이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한다며
      침을 튀기며 그들을 통해 무엇인가 가능하다고 믿다가도
      나중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어도
      사나흘이면 바다가 수그러지듯
      권력도 이내 한 풀 꺾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가 남편이 여편네를, 여편네가 남편을
      보듬고 자지 않아도 아무 걱정이 없다는 얘기는
      파도가 밀려들어 부서지고 또 밀려나가듯
      한 번 맺은 부부의 연은 하늘의 뜻이라며
      죽을 때까지 끊을 수 없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읍내에 있는 큰 아들이
      근 열흘을 가출 했다 들어와도
      집으로 돌아왔으니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도시풍의 듣기 좋고 보기 좋은 것들.
      세련된 목소리나 반듯하고 잘 생긴 외모,
      혹은 어황이 좋아 돈 좀 번 읍내 반짝부자들의
      검정색 승용차나 좋은 옷가지, 아니면 또
      네온사인 번쩍이는 읍내의 흥청거림에
      그는 놀랄만큼 무관심하다.
      눈만 뜨면 바다가 있고
      고개만 돌리면 일거리가 있는
      그의 바다같은 삶 때문이다.



      읍내 보건소의 약 한 봉지가 종합병원이고
      차가 드나들 수 없는 언덕배기 비탈길과
      마을 앞 자갈밭은 그의 손주들이 다니는 유치원이다.
      이웃집 아저씨,아주머니가 아이들의 교사인 셈이고
      물질을 하던 마을의 늙수그레한 과부아줌마는
      통장님 대신 마을을 둘러보러 다닌다.



      군것질로 조개전을 굽거나
      허접한 자리돔회국수를 해도
      옆집에 투숙한 낚시꾼을 불러들이는 그에게는
      몇 번 인사만 나누어도 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으며
      해 지나고 다시 만나면
      아는 사람이랍시고 잠도 얻어잘 수 있다.



      그는 어떤 고기가
      언제, 어디쯤에서 잡히는지를 알며
      어떤 사람이 좋고 어떤 사람이 버릇없는 지를 말하곤 한다.
      그의 "그렇지" 한 마디는 "멋지구나"하는 격려이며
      "안좋아" 한 마디는
      "바다가 거치니 조심해"라는 주의다.



      늘 웃는 얼굴로 따뜻한 인사를 나누는
      이제 육순에 접어든
      어느 작은 섬의 토박이 통장님은
      그가 만나는 모든 이들의
      섬이며 스승인 것을...




      배경음악...Henry Mancini...Gypsy violin ...Theme from darling Li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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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G 용맹정진 02-11-30 00:00
글 잘 읽었읍니다. -[02/09-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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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개똥반장 02-11-30 00:00
또,감사합니다. -[02/09-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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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섬원주민 02-11-30 00:00
잘 지내시죠. 이 통장님은 우리 섬에 어촌계장님과 너무 흡사하군요. -[02/09-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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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해밍웨이 02-11-30 00:00
산간벽지에도 간혹 그런분이 계시는걸 매체에서보노라면 그렇게 느슨하고 풍요로울수가요??... 그러나 아주 찰지게 살아가시는 분들이라 느꼈습니다. 소개하신 모델로도요............ 건강하십니까?? 제작년 인낚송밤에서 인사드렸던 서울 권기언씨 친굽니다...... 건강하시고 멋진글 계속해주십시오!! -[02/1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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